Short stories
삶은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다.
쥐덫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철망은 살을 더 깊이 파고든다.
내부로 향한 문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있다.
우리는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무시한다.
– 루크레티우스 로마 시인이자 철학자.
머리로 알고 입으로 말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無識한 鬼神은 符籍도 못 알아본다.
한 노인이 숲속을 걷고 있었다. 소리가 나서 보니 개구리 한 마리가 말을 하였다. 자신의 미모에 질투한 마녀가 마법을 걸어 개구리가 되었는데 자신에게 키스를 해주면 마법이 풀리고 평생 당신과 함께 있겠다고 하였다. 노인은 개구리를 집어 호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갔다. 개구리가 왜 키스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말했다. 함께 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만 필요하다고 하였다.
칠십대의 부자가 젊고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다른 부자 친구가 부러워하며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 물었다. 친구가 자기는 90살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고 대답했다.
천천히 걸어야 보인다.
차분히 귀 기울이면 들린다.
마음을 비우면 평온이 얻어지고
작은 변화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다.
보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다시 보이게 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자칭 대한민국 국보라는 양주동박사와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쓴 염상섭은 친한 사이였다. 구두쇠 염상섭이 원고료를 받아 호주머니가 두둑해지면 여우같은 양주동이 염상섭을 찾아가 포장마차에서 소주로 염상섭을 취하게 하면 급발진 한 염상섭은 방석집에서 원고료를 모두 썼다고 한다.
헤어진 애인이 잘 되어 있으면 배가 아프고
잘못 되어 있으면 가슴이 아프고
다시 만나자고 하면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확인하지 않으면 이 세 상태가 마음속에 중첩되어 있다. 내 기분에 따라 어느 상태도 가능하다. 확인하고 나면 한 상태로 고정 된다. 마음은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고 현실은 상대성 이론이 지배한다.
할머니가 임종을 맞이하여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울고 있었다. 할머니가 옆에 있는 친구를 부르더니 얘기했다. – 곧 너의 남편을 만날 것인데 전할 말이 없냐고 물었다. – 함께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
한 농부가 밭을 갈다 반지를 하나 주웠다. 반지요정이 무엇이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하였다. 이 농부가 나이가 들어 죽을 때도 그 반지를 그대로 손에 끼고 있었다.
모르면 재미없다. 조금 알면 재미있다. 고수가 되면 겸손해진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높은 장벽을 넘어야 한다. 한 번도 어디에서도 이 장벽을 넘은 적이 없다.
무엇을 알려고 노력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지만 알게 된다.
샤워를 하는데 날파리 한 마리가 있었다. 잡으려고 다가가면 어느새 날아간다. 좁쌀만한 것이 내 살해의 의도를 어떻게 알아채고 도망을 가는지 신기하다.
요즘은 online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젊은 시절에 했어야 할 공부를 지금 하고 있다. 주로 수학과 물리학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답답할 때도 많지만 어떤 목적도 목표도 없이 이 시간을 즐기기 위하여 한다. 마당에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마음이다. 새로운 나무를 심고 다양한 모양의 돌도 놓아보고 보기 흉한 것은 땅속에 묻어 버리고…
경제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는 지식 오직 호기심만으로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착각은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는가? 왜 전혀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는가?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자기증식능력, 에너지변환능력, 항상성 유지능력이라고 한다.
영원불멸의 진리는 없다.
사진은 색이 있는 작은 점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예쁜 여자 사진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졌다. 더럽다와 깨끗하다는 의미가 없다.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세포가 되고 생명도 된다. 어디부터 더럽다는 의미가 생성되는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 하였다. AI의 등장으로 보는 것에도 확신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아직은 방송이나 영상매체의 경우일 뿐이다.
인간은 농구공에 붙어 있는 세균처럼 지구 위에 존재한다. 산다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현상일 것이다. 원자들이 어떤 패턴으로 모여 분자가 되고 세포가 되고 생명체가 된다. 우리는 이런 패턴들이 모여 있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존재에 목적도 의미도 없다. 그냥 우리가 지금이라는 시간에 의미라는 생각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또는 이 시간에 레이블을 붙여놓은 것이다.
보는 것과 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까? 보는 것으로 하는 것의 대리 경험을 하며 만족할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일까? 숫자로 표현하면 모호한 감정의 잣대를 과학적 숫자의 개념으로 변환하여 가늠할 수 있다. 몇 퍼센트 정도 일까?
누구나 무엇에서든 옳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삶에서 고통의 많은 부분은 욕망과 집착에서 시작한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욕망도 사소한 것이다. 욕망도 내일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의 특권일수도 있다. 현재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신의 의지대로 살아왔다. 신을 살해하고 삶의 방향을 잃었다. 허무 속을 방황한다. 음악과 예술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것마저 부정한다.
하늘이 무너질지 땅이 꺼질지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두 발이 버티고 있을 만큼의 튼튼한 땅과 내 머리 위로 위험한 것이 떨어지지 않으면 충분하다.
지금 목에 핏대를 세우고 옳다고 주장하던 것도 내일이면 달라질 수도 있다.
믿음 소망 사랑
친절 겸손 인내
전도서 1:2-4 KRV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3: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고
헐 때가 있고 쌓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애통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고
뿌릴 때가 있고 모을 때가 있고
껴안을 때가 있고 멀리할 때가 있다
요즘은 다양한 정보와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넘쳐흐른다. 반세기 전만 하여도 다양성보다 깊이가 각 개인의 차이를 만들었는데 이젠 다양성이 그 차이를 만들고 있다. 한국 사람은 등수를 매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트랙을 만들고 거기서 달리게 하고 등수를 매긴다. 이 트랙에서 탈락하여 돌밭을 걷고 숲속 길을 헤맨다. 작은 풀밭에 누워 단 꿈을 꾸기도 하고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구속하는 것은 욕망이라는 밧줄이다.
삶은 단 한번만 주어진 기회이고 그 기회를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눈과 관심으로 결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혼자서 운전하여 뉴욕에서 Oregon으로 가고 있었다. 5일 째인 토요일 저녁에 Idaho의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미사 시간과 성당의 위치를 확인하고 모텔에서 자고 아침 미사에 참석했다. 성가 중에 하나가 ‘You are mine’이었다. 평소에도 좋아하던 성가였다.
‘I will call your name, you are mine’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소나기가 지나간 후 맑은 날씨 같았다.
혼자서 캐나다 road trip을 많이 하였다. 피곤하면 간이 휴게소에서 눈을 붙이곤 하였다. 깨어나니 아직 어두운데 짙은 안개로 덮여있었다. 안개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밝아오고 안개가 걷히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깊은 우울증에서 벗어나왔을 때 느끼는 상쾌함을 경험했다.
꿈속의 내 마음에도 내 의지가 작용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