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그리고 삶
죽을 만큼 사랑했던 그런 사람과
모른 체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하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 한통 하지 않을 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또 한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사람과
웃으며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변해버린 사람을 탓하지 않고
떠나버린 사람을 붙잡지 말고
그냥 그렇게 봄날이 가고 여름이 오듯
내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지 않아도
스치고 떠날 사람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고
내가 아둥바둥 매달리지 않더라도
내 옆에 남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내 옆에 남아준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고
아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 시간 내 마음 다 쏟고
상처 받으면서 다시 오지 않을
꽃 같은 시간을 힘들게 보낼 필요는 없다.
비 바람 불어 흙탕물을 뒤집어 썻다고 꽃이 아니더냐
다음에 내릴 비가 씻어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것은
너무 늦게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뻐긴다 해도
결국 하늘 아래에 놓인 건 마찬가지인 것을…
높고 높은 하늘에서 보면
다 똑같이 하찮은 생물일 뿐인 것을…
아무리 키가 크다 해도 하찮은 나무보다도 크지 않으며,
아무리 달리기를 잘한다 해도 하찮은 동물보다도 느리다.
나보다 못난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 하지 말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여 질투하지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하늘 아래 있는 것은 다 마찬가지 이니까.
무명의 詩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사만 있다면 말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中)
만남이 깊어지면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
사랑으로부터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God! grant m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in the next.
– Reinhold Niebuhr –
짐 알칼릴의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과학은 원래 실수를 통해 발전하는 것이고 실수는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실수로부터 배운다. 실수를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세상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과학이 정치와 다른 점이다.
정치인은 자기가 틀렸다고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과학의 역사에서는 과거의 실수에서 배웠던 사례가 많다. 자연의 작동 방식에 대한 더 나은 이해와 새로운 실증적 증거는새로운 가설과 낡은 이론을 교체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식의 가치를 사회에 어떻게 설명할까?
과학은 가설을 세우고 검정한 다음 데이터와 맞지 않으면 폐기한다.
정직에 대한 집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과학의 특징은 의심의 중요성이다. 이런 특성은 과학 연구 분야 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과학의 작동 방식을 사회에 적용할 때 이런 특성이 최대의 적이 된다.
과학은 무언가에 대해 결코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과학이론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현재까지 나와 있는 최선의 추측일 뿐이다.
새로운 관찰이나 데이터와 충돌하는 순간 수정되거나 폐기된다.과학자들은 바로 더 나은 이론을 찾아 나설 준비를 한다.
“당신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당신이 하는 말을 어떻게 신뢰하거나 믿을 수 있나? 어떻게 확실하지도 않는 것은 고수할 수가 있나?”
일시적인 최선의 추측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런 생각은 과학 발전 방식에 대한 오해이다.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확실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개방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과학은 현재의 지식에 의문을 품고 더 나은 것이 등장하면 언제든 더 깊은 지식으로 대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분야에서는 이런 태도가 변덕스러움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과학에서는 그렇지 않다.과학자가 양질의 정직과 의심에 흔들림 없이 전념할 때 비로소 과학은 발전한다.
Infinite Jest – David Forst Wallace
기쁨은 짧고 고통은 긴데 왜 이 삶을 살아야 할까?
당신이 숭배하는 그것이 당신을 집어삼킬 것이다.
반은 죽은 상태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작가는 말한다.
– 반은 죽은 상태?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얘기하는지 설명이 없어 모르겠다. 살아 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의 정의는 무엇인지? 문장을 이해하려면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육체와 외모와 성적인 매력을 숭배한다면 항상 못생겼다고 느낄 것이다.
– narcissism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외모를 위한 다양한 노력과 투자는 무의미한 것인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며 다이어트를 하고 고통을 견디며 운동을 하고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옷을 사고 치장을 한다. 화장을 하며 예쁜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즐거워한다. 이것은 행복이 아닌가?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 보이기 시작하면 백만 번은 죽을 것이다. 진짜 죽음이 찾아오기도 전에…
–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살면서 경험하는 절망과 좌절을 얘기하는 것인가?
권력을 숭배한다면 나약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인생을 살 것이다. 그 두려움을 잊고 싶어 더 많은 권력을 갈망할 것이다.
– 권력은 나에게 생소한 느낌이라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없고 더 할 수 있는 생각이 없다.
지성을 숭배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면 결국 자신이 어리석고 사기꾼처럼 느껴져 들킬까봐 두려움에 떨 것이다. – 지성을 숭배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함과 안락한 생활이 없을 것이다. 노력하여 얻게 되는 작은 발전과 발견은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 비록 그것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더라도…
돈이나 물질을 숭배한다면 그것에 인생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면 절대로 충분히 가지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충족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런 형태의 숭배가 위험한 것은 그 자체가 사악하거나 죄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무의식적이기에 위험하다. 그것이 default setting이기 때문이다. 그런 숭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이면 날마다 천천히 빠져 들어가고 점점 세상을 좁게 보고 편협한 가치관을 갖게 한다. 자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은 공포와 분노 좌절과 갈망을 연료로 잘 굴러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진리는 어떻게 세상을 볼지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무엇이 의미 있고 무엇이 무의미한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무엇을 숭배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여기 약간 이상한 진실이 하나 있는데 어른이 되어 겪는 매일의 삶 속에는 무신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숭배한다. 허락된 것은 무엇을 숭배하느냐에 대한 선택뿐이다.
지난 수 백 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것이 없었다. 자기 부모의 직업 신앙 마을 등 정체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신을 믿었고 그 신이 주는 의미를 따르면 되었다. 부모의 일을 이어받았고 가족과 마을을 지켜나가면 되었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default 상태였다.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로워졌다. 신에서 자유로워졌고 계급에서 자유로워졌다. 숭배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 가치관 진로 정치적 관점 등을 모두 스스로 탐색하고 발견해야 한다.
자유가 주어졌으니 좋은 것일까?
“이 세대는 의미 있는 도덕적 가치관은 아무것도 유산으로 물려받지 못했다.” 신을 잃고 공동체를 잃은 현대인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스스로 찾아야 했지만 대부분 default setting 대로 움직였다.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default setting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미디어에서 자주 나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멋지다고 말하는 것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의식할 새 없이 서서히 그것들은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외모를 숭배하라. 힘을 숭배하라. 돈을 숭배하라.
이 사회는 미디어의 지배하에 있다. 인생의 커다란 질문들이 오락으로 대체된 사회,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지나친 개인주의 지나친 물질주의 지나친 오락이 가득한 세계이다.
지나친 개인주의는 외로움을 불러왔고, 지나친 물질주의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외모든 돈이든 권력이든 숭배하다가 그것을 쟁취하든 못하든 절망에 빠진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고? 왜 항상 부족하냐고? 왜 고통밖에 없냐고? 기쁨은 짧고 고통은 긴데 왜 이 삶을 살아야하냐고?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무엇을 숭배해야 할까?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 자각 자제심, 그리고 진심으로 타인을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도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자각 default setting 쳇바퀴 경쟁, 무언가를 잠시 손에 넣었다가 잃어버린 것 같은 끊임없는 괴로움.
사람들은 명성 돈 사회적 인정을 위해 첫 번째 산을 오르다가 문득 공허한 외로움을 마주한다. 그리곤 오직 나를 위해 사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진정한 기쁨은 자유가 아니라 헌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아를 초월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내 속 어딘가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두 번째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두 번째 산에서 다음 네 가지에 헌신한다. 소명으로서의 직업, 배우자와 가족, 철학이나 신앙, 공동체.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지만 오직 한 사람을 선택하고 헌신하고 사랑할 때 가장 큰 기쁨이 있다. 인생에 의미가 되어주는 기쁨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어떤 의무를 가지고 일을 할 때, 삶에서 빛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숭배하는가?
그것이 충분히 가치 있는가?
default setting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사족 – 내가 답을 채우지 않으면 남이 답을 채운다. 사회가 원하는 허황된 답이 채워지고 타인의 기대에 따른 답이 채워진다. 지성을 숭배하면 항상 자신이 부족하게 보이고 사회적 인정을 숭배하면 허무함을 마주한다. 기꺼이 우리를 집어삼켜도 괜찮은 것을 숭배해야한다. 찾을 수 있다면… 자유를 바치고 모든 것을 바쳐도 허무하지 않을 의미가 있을 소중한 것에 헌신해야 한다. 무지개 같은 존재다. 있다고는 하나 아무도 본 적이 없거나 보여도 결국 붙잡을 수 없는 것. 우리가 돈을 바라는 것은 그 돈을 통해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